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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SANGDONG

  상동교회는 정동교회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대표적인 감리교회로서 지난 130여 년 동안 서울 장안에서 쌍벽을 이루며 이 민족의 무수한 아픔과 슬픔을 그 현장에서 목격하며 또 거기에 함께하여 왔다. 또한, 이 두 교회는 13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미국 북 감리교의 두 선교사들에 의해 창설되었고 또 이들 교회 창설자들의 성격에 따라 뚜렷한 특색을 지니면서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동 제일 감리교회』의 창설자인 「Rev. H. G. Appenzeller(아펜젤러)」는 정동에서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신교육의 기회를 열어주면서 이 민족의 복음화와 개화를 위하여 그의 젊음을 이 땅에서 불살랐다. 한편 『상동 감리교회』를 세우고 길렀던 「Rev. Dr. W. B. Scranton, M.D.(스크랜턴)」은 먼저 정동에서 감리교 병원 ‘시(施)병원’을 세워 약과 청진기와 수술기구를 가지고 이 민족의 질병을 담당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병과 가난과 더불어 싸웠다.


Rev. Dr. W. B. Scranton, M.D.(스크랜턴)
이들의 신앙도 감리교 창설자 웨슬리 John Wesley(1703-1791)의 전통에 따른 사회 지향적인 복음주의의 성격을 지녔고 이와 같은 이들의 신앙 전통은 각각 그대로 정동에서는 아펜젤러를 통하여 최병헌에게로 연결되었고 상동에서는 스크랜턴에게서 전덕기, 이익모, 홍순탁, 박용래에게로 이어 내려왔다.

특히, 상동교회는 전덕기 목사의 「섬기며 애국하는 목회 활동」을 통하여 구한말과 일제 통치 초기를 통하여 상동교회로 하여금 전국적으로 민족 독립운동과 한글 지도자 양성을 통하여 선진의 신문화 보급과 계몽운동의 요람지가 되게 하였다. 국운이 급속히 기울어 주권을 잃어버렸던 당시 이 민족의 암흑시대에 홀연히 민족의 새벽별같이 나타나서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으로써 이 민족에 봉사하며 그의 생활과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직접 보여줌에 상동교회를 당시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게 한 그와 상동교회의 민족사적 공헌은 길이 빛날 것이다. 전덕기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 사랑에 근거한 민족과 이웃에 대한 희생 봉사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전덕기 목사의 주위에는 양반, 상인, 학자, 촌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같이 모여들었다. 그의 지도력은 이렇게 포용적이요 초 계급적이었다. 따라서 상동교회는 처음부터 대중교회, 서민교회로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전덕기 목사와 105인 사건

전덕기 목사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고, 1907년 제6대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면서 상동 청년회 및 상동 청년학원을 통해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또 신민회 창립 핵심인사로 항일구국운동을 선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부친 전한규, 모친 임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9세 되던 해 부모 모두를 여의고 숯장수인 삼촌 집 양자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전덕기 목사는 17세 되던 해 당시 정동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미국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을 통해 결정적인 삶의 전환기를 맞게 됐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1885년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해 시병원을 설립하고 민중 지향적 선교를 전개한 인물로서 전덕기 목사는 그의 민중 지향적 목회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1903년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 내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해 정순만, 박용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 해체 이후 흩어졌던 민족운동 세력의 재규합을 위해 힘썼고, 이후 상동 청년회와 상동 청년학원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을사늑약 반대, 일제의 군 용지 매수반대, 일진회 등 친일어용단체 반대 투쟁 등 반일구국운동을 전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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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파와 상동 청년학원

상동교회에는 청년학원이 있었습니다. 1906년 상동 청년회가 세운 학교로서, 전덕기 목사를 필두로 김구, 이준, 이동녕, 이동휘, 노백린, 이회영, 남궁억, 신채호, 최남선, 이상재, 이상설, 양기탁, 주시경, 이필주, 이승훈, 안창호, 이승만 등 쟁쟁한 민족운동가들이 활동한 상동 청년회(소위 상동파)가 운영하였습니다.

전덕기 목사는 1904년 상동 청년학원을 통해 민족 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 양성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정신 앙양을 목적으로 두고, 독립지사들을 강사·교사·특별강사로 초빙하여 차세대 청소년들에게 교수토록 했는데, 교사도 각 분야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국문학자 주시경이 국어, 동경물리학교 출신의 류일선이 수학, 스크랜턴 목사의 모친 메리 스크랜턴이 영어, 헐버트와 이동녕이 세계사와 국사, 김진호가 한문을 맡았습니다.

특히 구한국 군대의 직업군인 출신인 이필주(훗날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는 체육을 가르쳤습니다. 여러 체육 종목을 지도함과 동시에 학생들에게 군복과 같은 유니폼을 입히고, 목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제식과 행군 등의 군사훈련도 실시했는데, 이러한 훈련 광경은 서울 시내의 유명한 구경거리였습니다. 대내외적으로 한국 청소년들의 기개와 기상을 선보이며, 일제에 대한 무언의 시위를 보이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전덕기목사 서신 (수신 : 안창호)




이준 청년회장과 헤이그 특사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전덕기 목사는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고종에게도 동의를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으며, 이준 청년회장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을사늑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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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청년회장은 그러나 끝내 회의 참석이 거부되자 우분울읍(懮憤鬱悒)하던 끝에 7월 14일 순국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 헤이그 특사의 파견은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한국 침략을 가속화시킨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세계 열강에 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으며 일제의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최초로 알렸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준 청년회장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습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이회영 권사와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항일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을 위해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학교입니다. 이회영 권사는 헤이그 특사 실패 후 국외에 독립기지마련을 위해 1910년 12월 여섯 형제와 가족, 노비 40여 명의 일가족 전체가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이때 여섯 형제가 전 재산(약 600억 원으로 추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으로 운용하여, 중국 길림성 유하현에 설립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만주, 간도 일대에서의 무장 항일투쟁의 초석이 되었던 곳으로, 이들 중 다수가 독립군의 일원이 되어 각지에서 활약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로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거 참여하여 큰 활약을 보이고, 무장 독립투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30년대 기준으로 졸업생이 3,500명 정도 되었다고 하며, 신팔균, 이범석, 지청천 등이 이곳에서 교관을 맡았습니다. 의열단 단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원봉도 이곳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이회영 권사는 1932년 11월 17일, 중국 다롄경찰서에서 고문 끝에 순국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우당 이회영 (강사 설민석)




이회영 선생과 독립군




  • 1885~1899
  • 1900~1959
  • 1960~1999
  • 2000~현재
1885. 05. 03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선교사 서울에 도착하여 선교사역 시작.
1885. 09. 스크랜턴 선교사 정동에서 환자진료 시작
1886 스크랜턴 선교사 정동병원 설립, 병원선교 시작. 고종황제 시(施)병원명 하사
1888 남대문 근처 상동으로 병원 이전, 병원 선교 활동 전개.
1888. 10. 09 상동교회 창립. 상동교회 대지 구입.
1893 스크랜턴 목사 초대 상동교회 담임목사
1895 - 1907 달성궁(현재 한국은행 자리) 내의 건물 구입. 교회이름을 달성교회로 호칭하기도함.
1898 (1) 전덕기 입교, 엡윗 청년회 조직, 민족 독립운동 전개.
1898 (2) 전덕기, 공옥(攻玉)학교 설립, 신학문 보급(상동교회 교육사업 시작), 6.25전란시 공옥학교 건물 소실.
1901 - 1907 <2-5대 담임목사>
2대 스웨어러(W. C.S wearer), 3대 최병헌, 4대 스웨어러(W. C.S wearer), 5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902. 05. 12 상동교회 새 성전 건축(Meed Memorial Church) 봉헌.
1904 전덕기 상동청년학원설립, 신학문 보급과 민족운동전개,1914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1905 상동 엡웟청년회에서 이범수, 박정현을 멕시코 동포 사찰단으로 파송.
을사늑약체결을 반대투쟁하며 구국기회를 열다.
1905.12.05 상동청년학원에서 <수리학잡지>발행
1906 상동청년학원, 상동파가 주축이 되어 신민회 조직. 구국 민족운동 전개.
1906. 06. 25 상동청년학원에서 <가뎡잡지>발행
1907 - 전덕기·이회영, 이준(당시 상동청년회 회장)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 자주 독립운동 추진 및 시행.
- 상동청년학원, 주시경 선생을 통하여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한글 보급 운동 전개.
1907 - 1913 설립된 지교회
공덕동교회, 창의문(세검정)교회, 연화봉교회, 북창동교회, 사촌리(마포)교회, 녹번현교회.
1907 - 1914 6대 담임목사 전덕기 목사의 목회사역
1910 공옥 보통학교 3층 벽돌건물 낙성
1912.04.16 서울 박문서관에서 번역서인 <日日의 力>이란 기도집 출간
1914 - 1959 <7-22대 담임목사>
7대 이익모, 8대 홍순탁, 9대 박용래, 10대 박용래, 11대 최성모, 12대 홍순탁, 13대 김종우,
14대 오화영, 15대 강태희, 16대 방 훈, 17대 임진국, 18대 심명섭, 19대 홍순탁, 20대 임진국,
21대 박창현, 22대 신흥철 목사.
1914.03.23 전덕기 목사 순국
1919. 03. 01 상동교회, 삼일운동 적극 참여
(민족 대표 33인중 본 교회 출신 4인 - 최성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1922.03.23 스크랜턴 선교사 일본 고베에서 서거
1951. 1‧4후퇴때 국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상동교회 주변인 명동, 남대문시장, 중앙우체국 등 화재로 초등학교 건물과 함께 소실
1959 - 1988 23대 담임목사 박설봉 목사의 목회사역
1962. 전덕기 목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위패를 모심
1964 - 1987 <설립된 지교회>
송추상동교회, 신림상동교회, 봉담상동교회, 시카고상동교회, 인천상동교회, 병점상동교회, 문산상동교회
1967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현 안산시)에 교회 공원묘지(상록원) 설치
1971 대천에 수양관 건립. 1991년 대천 재개발 계획에 의해 수용 철거됨
1973 삼일중학교, 삼일실업고등학교 재단 인수, 경영.
1976 상동교회 현재 새 성전 건물 준공
1977 서울 감리교 신학교 설립(현재 협성대학교 모체)
1977 - 1998 새로나백화점 설립 및 경영
1986 김정한선교사 파송(케냐)
1988 상동교회 후면 별관 5, 6, 7층 증축
1988 - 2005 24대 담임목사 이동학 목사의 목회사역
1988. 10. 09 상동교회 100년사 발간
1989 - 1996 지교회 설립 건축. 삼일상동교회, 유천상동교회, 능서상동교회
1990. 04 송충석선교사 파송. (케냐)
1991 - 상동교회, 협성대학 지원. 정규대학으로 인가, 종합대학교로 승격
1992. 04 양정하선교사 파송. (스리랑카)
1994 대천 상동수양관 건축. (대지 210평, 건평 400평)
1995 - 2003 담임목사 및 부목사관 3동 구입
1995. 05 박종건선교사 파송.(스리랑카)
1999. 12. 08 상동교회 111년사 발간
2003. 07 서준석선교사 파송 (도미니카)
2004 홍성훈선교사 파송(케냐)
2005. 12. 25 - 2019. 07. 28 25대 담임목사 서철 목사의 목회사역
2007. 07. 08 상동교회 CCC 공동선교사 파송
2007. 09 이준 순국 100주년 기념 '헤이그 한인교회' 예배당 구입 참여
2007. 10. 07 '민족교회연구소' 창립
2008. 10. 05 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음악예배' 및 Home Coming Day 행사
2009. 04.12 스크랜턴 기념사업회(Mary F. Scranton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 조직하여 준비진행
2009. 10. 07 -15 스크랜턴 대부인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 및 행사 개최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교회, 이화여대, 이화여고 공동 추진)
2009. 10. 11 스크랜턴 후손 상동교회 방문 (Paul Addington, Sally and kevin Gale, Thomas and Henrietta Davies)
2009. 10. 12~15 스크랜턴 대부인 서거 100주년 기념으로 일본, 스크랜턴 묘지 방문
2010. 06. 29 - 07. 08 해외단기선교 및 파송선교사 선교지방문 (스리랑카)
2010. 09. 26 류지영선교사 파송(러시아)
2010. 11. 17 우당 이회영권사 망명 100주기 추모예배 및 기념식
2011. 06. 26 - 07. 08 해외 단기 선교 및 파송선교사 선교지 방문 (케냐)
2013. 05. 01 케냐선교재단 창립
2014. 03. 01 전덕기목사 다큐멘터리 방송(KBS 3.1절 특집 방송)
2014. 03. 13 전덕기목사 서거 100주년 추모식 및 학술대회
2014. 03. 20 전덕기목사 서거 100주년 추모예식
2014. 10. 05 스크랜턴 전기출판 감사예배
2015 스크랜턴 선교130주년 행사 (CBS 간증방송 3. 20) (쌀나눔행사4.1)
2015. 08. 15 필동 임면수선생(삼일학원 설립자) 동상제막식
2015. 11. 08 광복70주년 기념 통곡기도회
2016. 11. 01 전덕기목사 전기출판 감사예배
2018. 10. 07 교회창립 130주년기념 음악예배
2018. 10. 07 스크랜턴 자료집 출판 감사예배
2018. 10. 09 교회간판 및 십자가 설치 및 점등식
2019. 02. 24 3·1운동 100주년기념 감사예배
2019. 10. 06 스크랜턴 자료집 2권 출판 감사예배
2019. 12. 31 26대 담임목사 이성조 목사의 목회사역
2020. 05. 03 7층 역사자료 설치 및 게시
2020. 10. 4 교회창립 132주년 기념 전교인 구약성경 성경필사본 봉헌
2021. 05. 14 한국 개신교 첫 목사안수 120주년 기념예배 상동교회
2021.8.23-11.20 상동교회 전교인 90일 성경통독 특별새벽기도회
2022. 03. 23 - 04. 30 스크랜턴 선교사 서거 100주기 기념사업 및 행사개최
(서울연회,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교회 공동 추진)
-동대문교회 복원예배 및 3‧1절기념예배 (3월1일)
-스크랜턴 서거 100주기 기념 추모제 (3월23일)
-스크랜턴 서거 100주기 기념 영성집회 (3월27일)
-스크랜턴 서거 100주기 기념 심포지엄 (4월30일)





역대 담임목사

  • 1,5대
    스크랜턴 목사
  • 2,4대
    서원보 목사
  • 3대
    최병헌 목사
  • 6대
    전덕기 목사
  • 7대
    이익모 목사
  • 8, 12, 19대
    홍순탁 목사
  • 9,10대
    박용래 목사
  • 11대
    최성모 목사
  • 13대
    김종우 목사
  • 14대
    오화영 목사
  • 15대
    강태희 목사
  • 16대
    방훈 목사
  • 18대
    심명섭 목사
  • 22대
    신흥철 목사
  • 23대
    박설봉 목사
  • 24대
    이동학 목사
  • 25대
    서철 목사
  • 26대
    이성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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